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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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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5-23 18:03:23 조회수 280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담쟁이넝쿨은 담이 가로막고 있다고 절대 불평하지 않습니다. 벽이 아무리 높아도 그냥 넘어갈 뿐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부터 묵묵히 벽을 타고넘는 담쟁이들을 볼때마다 감격에 젖습니다. 그리고 블루베리와 몇 종류의 식물들을 키우면서 저는 어느새 식물 예찬론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겨울밤에 저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블루베리 나무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동물은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로 얼마나 약싹빠른지 모릅니다. 비바람이 칠 낌새만 보여도 얼른 안전한 곳으로 피합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그것이 비든 눈이든 아니면 태풍이든 그냥 묵묵히 온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식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피하지도 불평하지도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과는 많이 다릅니다.

  혹독한 추위가 지나가고 봄이 왔을때 저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120주의 블루베리 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았을까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세 그루를 빼고는 모두 연초록 꽃눈과 잎눈을 내밀며 저를 향해 배시시 웃어주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었습니다. 그 딱딱한 나뭇가지를 뚫고 어떻게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순이 나왔을까요? 그것도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말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기들끼리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식물은 이렇게나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우린 식물들만큼 때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도, 고집을 꺾어야 할 때도, 회개해야 할 때도, 용서해야 할 때도 잘 모르니까 말입니다.

  식물은 자리 탓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앞에는 바위틈 속에서 자라난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가 바위틈이든 척박한 땅이든 식물은 그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환경 탓을 많이 하는지요!
  식물은 그렇게 만든 열매를 자기가 먹지도 않습니다. 그 인내의 열매를 오히려 폭풍우를 견뎌내지 않고 도망간 동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욕심많고 이기적인 우리들과는 다릅니다.

  식물은 가지를 잘라도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쪽 길을 차단하니 순순히 다른 길로 나아갈 뿐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은 상처를 받으면 날카로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식물은 상처를 입으면 향기를 발산합니다.
  아, 생각하면 할수록 식물에겐 성숙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식물 앞에서 자꾸만 부끄러워지고 왜소해집니다.

  식물은 알아달라고 소리지르지도 원망과 불평의 목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 있어도,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식물은 그곳에서 예쁜 꽃을 피우고 환하게 웃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한 분 자기를 만드신 주인은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분을 향해 최선을 다해 웃고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습니다.

  식물의 그 인내와 순종, 그 긍정적인 자세와 이타적인 태도, 깨어있는 모습과 충성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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