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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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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5-28 13:30:18 조회수 303
  소설가 김혜진의 단편소설 '다른 기억'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대학교의 신문사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소설은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을 3인칭으로 기술하지만 이 소설은 1인칭과 2인칭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 신문사의 편집장이 주요 인물인데 '너'라는 2인칭으로 나옵니다. '나'라는 1인칭은 작가 자신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소설은 신문사의 주간교수를 바라보는 '나'와 '너'라는 두 인물의 시각차이로 말미암는 갈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신문사의 주간교수가 바뀝니다. 그리고 그 교수는 대학의 징계위원회에 회부됩니다. 연구비와 출장비를 횡령했다는 의혹과 연구실적과 논문을 조작했다는 내용, 그리고 강사들과 대학원생들에게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아 몇 건의 고소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이유입니다.
  신문사에는 새로운 주간교수가 오고 그는 이 건에 대한 특집기사를 준비하자고 합니다. 누가 취재를 할 것인지 묻는데 1인칭 '나'가 자원합니다. 이런 사건은 대학신문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편집장인 '너'를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전의 주간교수에 대한 의혹을 전혀 믿지 않는 입장입니다. 많은 의혹이 이미 어느정도 드러났기 때문에 대학당국의 징계위원회에 회부가 되었을테고 신문사의 주간교수 자리도 박탈되었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후 너와 나의 대화는 이러합니다.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난 사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적어도 모든 걸 밝히고나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어?"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해? 어떻게 너까지 이럴 수 있어?" 

  '너'라는 편집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주간교수에 대한 의혹을 철저하게 믿지 않을뿐만 아니라 믿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입니다. 이런 일은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너와 내가 주간교수의 연구실에 갔을 때입니다. 선생님의 손에는 이전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머리칼을 넘길 때마다 왼쪽 목덜미에는 붉고 푸른 멍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책상 앞 상자에는 샴푸와 비누, 칫솔과 수건,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집장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는가 봅니다. 사건에 대한 선생님의 변명을 듣고 안도하며 기뻐 들떠있는 편집장에게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도 네 생각을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작가는 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때때로 너는 너무나 고집스럽고 그래서 사람을 질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 그런 것들을 한 번 정하고 나서는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 선생님은 교수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고 학교를 그만 두어야만 했습니다.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혼했다는 말도 털어놓았습니다. 대학 당국의 징계위원회 결과와 신문사의 취재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말을 통해서 결국 모든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편집장이었던 '너'는 여전히 선생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테이블을 닦으며 고개를 숙이고 픽 웃었다는 장면을 작가는 재치있게 그려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진 문장으로 그녀의 마음을 설명합니다. "별 일을 다 보겠다는 듯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참 아름다운 태도이며 우리 모두가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기억'은 그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맹목적인 찬양을 꼬집는 소설입니다.
  '盲目'의 사전적 뜻은 이러합니다.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눈,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하는 일'.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맹목이 많아 보입니다. 이단에 속한 종교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주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도, 모든 증거가 드러나 법에 의해 형벌을 받더라도 여전히 추종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비단 종교영역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극도의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심각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소설 속의 편집장처럼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 그런 것들을 한 번 정하고 나서는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명명백백하게 사실로 드러나도 그 사실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상태를 '맹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심리적 용어로는 '확증편향', 또는 '인지 부조화'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에베소의 어떤 큰 무리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분노가 가득하여 일제히 대형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기를 놀랍게도 두 시간이나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태반이나 그들이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9장). 

  진영논리는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을 추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크게 감명을 받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은 언제나 옳다는 확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도 어디까지나 사람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탄이 쳐 놓은 올무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별 일을 다 보겠다'는 어떤 아주머니의 조롱 섞인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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