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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항구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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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5-24 22:30:49 조회수 301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레바논에는 '수르'라는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그리스어로는 '티로스'라고 불렸으며 성경에서는 '두로'라고 부릅니다. '두로'는 '바위'라는 뜻이며 원래 본토에서 떨어진 바위로 된 섬이었습니다.
  고대에 두로는 바벨론만큼이나 유명한 나라였습니다. 바벨론이 육상세력의 대표주자라면 두로는 해양세력의 대표주자였습니다. 두로는 튼튼한 배, 그리고 뛰어난 항해술과 노련한 상술로 막강한 부를 누렸습니다. 두로는 지중해를 자신들의 안마당처럼 누비며 스페인과 이집트 등을 오가면서 해상무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북방에 있는 해발 2,815m의 헬몬산의 잣나무로 배의 갑판을 만들었습니다. 돛대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노는 골란고원의 질 좋은 상수리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선실 및 일부 갑판은 키프러스 섬의 황양목에 상아로 꾸몄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수 놓은 가는 베로 돛을 만들어 깃발을 삼았고, 엘리사 섬의 청색 자색 베로 갑판 위의 차일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부유했고 그들의 배는 이처럼 화려했습니다. 

  티로스는 사면이 바다였으므로 침략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여러나라의 용병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은 부족함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심히 교만해졌습니다. 두로의 왕은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신이라고 이야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로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에스겔 28:9) 

  우리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코의 호흡에 생명이 달려있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매 초마다 숨 쉬기 위해 허파를 움직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매 초마다 심장을 뛰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낮에도 그러하지만 잠을 자는 밤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제력으로 인해 이처럼 교만했던 두로를 향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멸되었으니 들어갈 집도 없고 닻을 내릴 항구도 없다. 키프로스에서 너희가 이 소식을 들었다."(이사야 23:1, 새번역성경)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두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스페인의 다시스까지 왕래하는 훌륭한 상선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역선들이 다시스를 거쳐 키프로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놀라운 소식을 들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갈 집과 항구가 없어졌다는 비참한 소식이었습니다.
  호화스러운 배로 최고의 상품들을 실어나르며 익숙한 상술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세계를 누비며 무역하던 그들이 이제 사치스러운 것들을 가득 싣고 돌아오는데 배가 귀항할 항구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는 잠시 후에 본향으로 돌아갈 여행객들입니다. 우리의 여행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은 귀항할 항구가 있는가요? 들어갈 집이 있는가요? 당신의 배에 값진 것들이 얼마나 많이 실려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배를 댈 항구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트피플'이라는 말을 메스컴을 통해서 듣곤 합니다. 바다에 배를 띄워 그 배 안에서 사는 사람 또는 해로로 비공식적으로 배를 몰고 탈출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보트피플은 1970년대 베트남 전쟁 때부터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낡고 좁은 배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타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지붕도 없는 배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을 이어서 걸어놓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바람을 막아주겠으며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생리현상은 어떻게 해결하며 아픈 사람은 또 어떻게 치료할까요? 

  그들에게 더 난감하고 슬픈 일은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표류하다 어떤 나라의 해변에 도착했는데 그 나라에서는 약간의 양식과 약품만을 주고는 해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한 발짝도 내리지 못한 채 그렇게 망망대해로 쫓겨났습니다. 들어갈 항구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종착지에 대한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돌아갈 조국,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까? 들어갈 항구가 있습니까? 이것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귀향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이제 더 이상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피곤한 삶이 아닌 고향의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본향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환영은 커녕 유리하는 별들처럼 떠돌다 결국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 속으로 버림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두로처럼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종말은 이렇게 비참할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보트피플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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