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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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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1-21 18:33:09 조회수 470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성경 어디에 쓰여 있는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길거리에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 사제도 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가요. 이교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만 나그네를 살려주고 갔어요.
  그러면 기독교인이 천국에 가겠어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천국에 가겠어요? 이러면 제사장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이교도가 천국에 가는 거에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가는 거에요. 

  위 글은 '한국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꽤나 이름 있는 분이 기자의 질문에 답한 말입니다. 이 분은 2007년에 딸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집필했고 교회에 강연도 많이 다녔던 분이십니다.
  대단한 지성인이시므로 저는 이 분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내심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분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의 '훌륭한' 답변에 감동해 신문에 대서특필한 크리스천 기자에게도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분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관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처럼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권선징악에 바탕을 둔 이런 구원관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목적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원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그러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답형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 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고자 했던 것은 인종과 국적을 떠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의 의중을 예수님께서는 훤히 보고 계셨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율법교사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이런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 행하고 지키면 나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국에 가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착한 일에 열심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은 받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지, 우리 사람은 얼마나 악한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죄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그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이는 십계명을 요약한 내용으로 율법의 축소판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완전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계명을 지키되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해 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다시 와서 지금과는 다른 올바른 질문을 하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질문은 어떠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질문은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천국에는 도대체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수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저에게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악한지 압니다. 저한테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이 기도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반면에 함께 성전에 나아왔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처음에 언급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한 질문과 같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끝맺습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너도 이 사마리아인처럼 선을 행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너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무도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마 사마리아인은 내 이웃이 아니겠지! 어떻게 사마리아인까지 사랑할 수가 있어?'라고 생각한 그 율법교사처럼.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당돌한 질문을 했던 교만한 율법교사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천국에 갈만큼 그런 선을 가지고 계십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서 2:1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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