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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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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6-15 11:19:37 조회수 360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8)

  살다보면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분노는 두 경우에 일어납니다. 하나는 내 생각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 때입니다. 이런 경우는 타인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해당합니다. 타인이 나보다 잘했고 옳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맏아들인 가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자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아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왜 안색이 변하며 어찌하여 분을 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주관하려고 문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너는 죄에게 지지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그러나 가인은 결국 죄에게 굴복해서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이렇게 분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일어났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인이 분을 낸 것은 동생이 잘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잘못은 가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의 근원인 피가 필요했는데 가인은 피 없는 제물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시니 분을 내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가 망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본 요나는 매우 싫어하며 성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며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자 성읍 동쪽에서 초막을 짓고 지켜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요나의 모습입니다. 그런 중에 요나는 또 한 번 성을 내었습니다. 자기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주던 박넝쿨이 시들어서 뜨거운 해가 내리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말을 성급하게 쏟아냅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네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뉘우침과 돌이킴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도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오히려 성을 냈습니다. 요나도 가인처럼 남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되지않은 일로 인해 분을 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또 하나의 경우는 나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된 언행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노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우리를 행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분노합니다. 그 분노가 나를 행악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결국 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왜 타인의 잘못 때문에 내가 징계를 받아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잃어야 합니까?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마음을 넓혀 너그러운 선택을 하면 징계가 아니라 오히려 칭찬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화 낼 자격이 없습니다. 내게 잘못이 없다면 화 낼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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