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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삽니까 가슴으로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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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6-07 11:15:21 조회수 331
  "심판은 신학자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사랑은 목회자의 가슴에서 나왔다."라고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다." 머리로 사는 사람은 일견 똑똑해 보이지만 아직 삶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슴으로 사는 사람은 어리숙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수준 높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모든 삶을 율법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그들은 율법 이상의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문율법 외에 구전율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전율법을 성문화시키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그 성문화된 구전율법에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 책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63권으로 이루어진 75kg의 무게에 달하는 탈무드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만해도 39가지나 됩니다. 몇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안식일에는 머리를 빗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털이 뽑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털을 뽑는것은 양모 소재의 옷을 만드는 과정의 한 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샤워를 해서는 안 됩니다. 씻는 활동은 옷을 만들 때 양털을 씻는 일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알파벳 글자를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워서도 안 되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불을 켜거나 끄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지금도 안식일 엘리베이트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는 엘리베이트입니다. 저절로 각 층마다 다 서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수많은 법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법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정확히 보신 그리스도께서는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태복음 23:2-4). 

  그 결과 그들은 차가운 법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가슴을 기대하기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병들어 앓고있던 한 여자를 고쳐주셨을때 보인 회당장의 반응은 그들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때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했다며 분을 내었습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누가복음 13:15,16). 

  그 여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병에서 놓여 자유함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회당장의 마음에는 기쁨이나 축하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으로 돼지가 먹던 쥐엄열매를 먹으며 살다가 거지 모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뛰어나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은 아버지와는 판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누가복음 15:29,30) 

  그는 모든 것을 법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연민이나 사랑이나 포용 등의 개념은 없습니다. 원래 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랑의 정신이 숨어 있음을 바리새인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앞의 회당장처럼 차가운 법의 사람들임을 그리스도께서는 아셨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눈에는 자기 동생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었습니다. 동일한 한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나 달랐습니다. 이 관점의 차이는 머리와 가슴의 차이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여행을 평생토록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으로 사는 삶은 사랑과 용서의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로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로 살게 해 주소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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